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문단 편집) == 설명 == [[3.15 부정선거]] 직후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시위는 4월에 들어서야 서울에도 상륙했다.[* 다만 부정선거가 알 사람들은 다 알 정도인지라 시위는 소규모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다 보니 소규모의 시위가 더 큰 시위가 되지 못하고 해산당하기 일쑤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대학 연합 시위가 본격적으로 계획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유기되었던 시신이 마산항 부두에서 발견되며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러한 사건들은 초기에는 시위에 다소 미온적이었던 대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고[* 2.28, 3.15 등 초기 시위는 고등학생이 주도했다.] 4월 15일에 있었던 합의에 따른 서울 시내 대학의 전체 거사일은 21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선수를 날린 것은 [[고려대학교]]였다. 마침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4월 16일 전체 신입생 환영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1961년까지는 학교 입학이 3월이 아닌 4월이었다.] 이때 학생들이 모인 틈을 타서 한꺼번에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이 행사를 18일로 연기한다.[* 현재와는 다르게 당시는 사람이 조금만 모여도 "데모하는 것 아니냐"며 해산, 구금 등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분위기였다. 신입생 환영회는 합법적으로 여러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이는 구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일:external/cham4.jinbo.net/4.18%EA%B5%AD%ED%9A%8C.gif]] 당일인 [[4월 18일|18일]], 10시 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신호에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현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앞까지 행진하여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행진 도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여러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 그 중에는 불운의 시위 참여자가 있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는다고 국밥을 먹었다가 체해서 행진 시위에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하고 빠지게 된 사람이 있었다.] 다만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대를 응원해 주기도 했다고. 국회의사당에서 [[유진오]] 당시 고려대 총장과 [[이철승]] 의원[* 야당인 [[민주당(1955년)]] 소속이었으면서도 이 습격 사건 지휘자인 깡패 [[임화수]]와 친구 사이였으며 명색이 야당 의원이면서도 임화수를 두둔하는 바람에 고려대 학생들은 이철승도 정치깡패와 한패라고 분노했다.] 등과 면담한 학생들은 일단 저녁이 되자 집회를 해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일부는 국회의사당 앞에 남아 농성을 결정했다. 나머지 시위대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학교로 복귀하기로 했다. 이때에도 복귀하는 동안 경찰로부터 평화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경찰차가 갑자기 시청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을지로 쪽으로 갔다. 경찰차가 깡패 습격을 위해 원래 경로가 아닌 다른 경로로 유도한 것이다.[* 일단 고려대생들을 잘 달래서 학교로 복귀 시키되 잔인하게 응징해서 다른 대학의 저항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평화시위를 하면서 학교로 돌아가던 중 청계4가에서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소속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받아 수십 명의 학생들과 몇 명의 기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비교적 경미한 부상을 당한 학생들은 깡패들은 나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교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술할 '학생 1명 사망?'의 주인공 되겠다. 당시에도 언론의 자유는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구타당하여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이를 본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19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4-19&officeId=00020&pageNo=3&printNo=11701&publishType=00020|#기사]] [[http://bbs.catholic.or.kr/attbox/bbs/include/readImg.asp?gubun=100&maingroup=2&filenm=06(831).jpg|당시 사진]] 지금도 그렇지만 [[대한민국]]에는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기풍이 짙게 남아 있었으며 학생 인구의 대다수가 대학 교육을 거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와는 달리 [[문맹]] 퇴치 교육으로 겨우 문맹에서 벗어난 세대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부모님 일을 돕거나 따로 취직을 해서 밥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생]]이라고 하면 21세기 [[대학원생]]의 위치도 가볍게 넘어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며 그야말로 앞으로 사회를 짊어지고 갈 동량이 될 인재로서 여겨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 1960년 당시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수가 9만 3천명 정도였다.[[http://khei.re.kr/post/512|#]] 반면 2021년 신규 석사학위 취득자가 8만명, 박사학위 취득자가 1만 6천명 정도이다.[[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11|#]] 당시 대학 재학생 1/4가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2만 3천명인데 현재 석사 졸업생보다 훨씬 적고 박사 졸업생 수에 가깝다.] 그리고 [[정치깡패]]들은 일반 사회에서는 [[인간 쓰레기]]로 여겨지고 있어서 이후 군사 정권에서는 마구 [[사형]]시켜도 반발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학생 한 명이 한쪽 눈을 심하게 다쳐 사경을 헤맬 정도로 다치는 바람에 병원으로 옮겨져 기사 표제로 '학생 1명 피살?'이라고 나갔는데, 물음표가 실제로 보면 눈에 띄지 않았기에 "깡패 새끼들이 대학생을 때려죽였다더라!"로 와전되어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특히 [[동아일보]]가 이를 앞장서서 보도했다.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1891)|김성수]]가 인수한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의 전신이었기 때문.[* 훗날 이 때문에 동아일보는 [[언론통폐합]] 당시 DBS를 KBS에 빼앗겼다. 비슷한 맥락으로 CBS도 보도기능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이 또한 4.19 당시 침묵하던 KBS와 달리 CBS는 미국계 종교자본이었기 때문에 속보를 빵빵 날렸던 이유가 컸다. [[신군부]] 측에서 이들 방송의 전력을 두려워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미 2월부터 특집코너로 부정선거 관련속보를 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날 보도도 그의 연장선이라고 추측된다.[* 1975년 동아일보 해직사태 이전이다.]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에는 이 날을 기리는 의미에서 4.18기념관이 존재한다. 다만 4.18과 관련된 전시 공간은 아니며 교내 부처 사무실 혹은 복지공간으로 사용된다. 관련 전시물 관람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백년사전시실에서 가능하다. 또한 4.18 구국대장정 혹은 정파에 따라서는 민중해방대장정이라 부르기도 하는 행사를 통해 매년 4.18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구타를 당한 건 사실인데 깡패들이 먼저 학생들한테 [[시비]] 걸었다가 [[개발살]]나서 쪽팔린 나머지 나중에 몰래 습격해 구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낮부터 학생들과 깡패들의 소규모 충돌은 있었고[* 당시 깡패들 중에는 정치깡패가 다수 있었고 이들은 사실상 [[자유당]]의 수족이었다.] 이러한 것이 누적되어서 학생들이 동대문파의 구역에 들어섰을 때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당시의 [[깡패]]들이다. 자신들이 한 일이 계획적인 집단 폭력이 아닌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86149|#]] 애초에 시위하고 있는 군중에게 시비를 건 것부터 무리수였다. 게다가 고려대학교 항목의 '야사모음집'에도 나와 있지만 당시 고려대생들은 어지간한 깡패들보다 더 깡패 같은 학생들이었다.[* 여담이지만 당시는 사실 지금처럼 [[조직폭력배]]가 기업화나 조직화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멀리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대부분 동네 불량배 수준이었다. 후대에 미화된 이미지 때문에 당시 조폭들이 거창해 보이지만 그 시대에는 주먹 좀 쓰고 성질 사나우면 대충 깡패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적지 않은 깡패들이 본업이 따로 있거나(나이트클럽 기도, 도박, 미군 면세품 밀수 등) 필요할 때만 모이곤 했다. 그래서 싸움 잘하는 대학생을 형님으로 모시는 깡패가 존재할 수 있었다.] 실제로 깡패가 쇠갈고리를 들고 "야 이 새끼들아!"라고 시비를 걸어서 한 학생이 "뭐 임마?"라고 대꾸했더니 그 학생이 깡패가 형님으로 모시는 학생이어서 깡패가 "어이쿠 형님"하고 조용히 사라졌다는 일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대 학생 측에서도 부상자가 꽤 많이 나왔고 심지어 깡패들에게 서서히 밀리기도 했다. 이때 고려대학교 [[공수도]]부(現 태권도부)의 부장인 [[사학과]] 주석환이 '''"고대 죽었느냐, 공격 개시!"'''라고 외쳐서 고대생이 반격에 들어갔고 결국 깡패들은 퇴각했다.[* 주석환은 훗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고 회고했다. 한편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 중 한 명은 '''"이봐, 고대 죽었어? 다 일어나 공격!"'''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